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십자가 아래에서
십자가 아래에 서면
돌처럼 굳은 내 가슴이 부끄럽습니다.
쏟아지는 포화 속에서
피흘리며 울어대는 바그다드의 아이들,
그 눈물로 얼룩진 TV 화면 앞에서
분노조차 느낄 수 없었던 나의 불감증이
못견디게 부끄럽습니다.
십자가 아래에 서면
성체 앞에서 자신있게 내밀던 내 두 손이 부끄럽습니다.
우리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으신 주님보다
생명보험 증서 한 장이 더 믿음직스레 보이는
나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.
십자가 아래에 서면
주님이 가신 길 따라 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길이
어렴풋하게나마 보입니다.
깨지고, 낮추고, 비우고, 나눠야 하는 길,
그 길 끝에 비로소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
이젠 알 것 같습니다.
십자가 아래서는
무거운 등짐 부려놓고 편히 잡들 수 있습니다.
내가 지은 어둠만큼이나 깊은 은총의 빛이 나를 감싸고
'이제 다 이루었다'며 내쉬던 주님의 마지막 숨소리가
어느새 자장가 되어
긴 방황에서 돌아온 나를 재웁니다.
- 김 용 기 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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